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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아이에게 배우다 1

    아이들과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뒷좌석에 앉은 하영이가 갑자기 "아!....."하고 매우 아쉬워한다. 휴대폰에서 글을 쓰고 있었는데 복사하기와 붙여넣기를 하려다가 '환경'이라는 두 글자만 남기고 다 지워졌다는 것이다. 굉장히 길게 썼는데 다시 되돌릴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 너무 아깝겠다고 어떡하냐고 묻는 내게 "다시 쓰면 돼죠. 다시 쓰면 더 잘 쓸 수 있을 거예요." 하고 하영이가 말한다. 하영이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빠른 시간 내에 태도를 바꾼 하영이의 첫번째 대답에 놀랐고,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두번째 말에는 더 많이 놀랐다. 우스갯소리로 내가 만약 그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몸소 아이들에게 보여주니 뒤에서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도 나라면 아쉬움과 후회로 미련이 남아, 보는 사람한테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소연했을 거다. 혼잣말로도 "아...... 두 글자밖에 남지 않았다니......  얼마나 많이 썼는데" 하고 중얼 거렸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영이가 신기했다. 자신을 다독이기 위해서라도, 이미 지나가버린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하면 돼."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일 것이다. 화를 내거나 다시 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다시 하는 게 나를 위해서 더 나으니까. 그런데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은 훨씬 더 긍정적인 반응이다. 마치 더 잘 쓰기 위해서 이전 것이 지워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전은 연습이었고 지금부터 실전이라고, 때를 기다려온 것처럼. 

  놀라운 하영이를 보면서 나도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무늬만 긍정형 인간이 아니라, 진실된 긍정의 힘이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사람. 한편으로는 늘 후회와 걱정, 염려가 많은 엄마의 그늘 아래서 긍정의 씨앗을 묵묵히 품고 싹을 틔워낸 하영이가 고맙다. 음지에서도 푸릇한 싹이 틀 수 있을까? 후회와 불안을 쏟아내는 엄마의 어두운 표정 속에서도 하영이는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고 돌볼 수 있었을까? 나는 그것이 강렬한 빛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이 많이 어둡고 힘들 때 나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내 자신을 일으켜 세워야 했지만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나는 무너진 그대로 땅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온전하고 완전한 빛이 하영이를 향해 비추고 있었다. 사실 그 빛은 나를 향해서도 비추고 있었지만 내가 손 쓸 수 없는 짙은 그림자가 나를 뒤덮고, 나는 거기서 헤어나오기를 거부했다. 그 그림자를 걷어내는 일은 모순적이게도 쉬운 일이었지만, 내게는 나와 내가 있는 세상 전부를 짓누르는 것 같은 무게로 무겁게 다가오기만 했다. 그 시간 속에서도 강렬한 하나님의 빛이 내게도 하영이에게도 동일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하영이는 음지 속에서도 그 빛의 기운을 받아 싹 틔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나도 깊은 어둠에서 나와 그 빛을 받는다. 빛을 받고 밝게 보니 예쁘게 자란 하영이가 보인다. 하영이에게 충만한 그 빛으로, 싹 틔운 나무가 자라 가지가 무성하며 굵어지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을 것을 믿는다. 그리고 더 많은 영혼을 가지에 깃들게 하며 자신을 찾아온 영혼들에게 열매 나눠줄 것을 기대한다. 빛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을 덮는 그림자와 음지를 너머 빛을 볼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드높이 뻗은 가지가 되기를 기도한다. 하영이에게 빛이 비추었듯이 그들이 다시금 그 빛을 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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